크리스찬 디올, 여자 명품 패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Christian Dior)

크리스찬 디올 (출처 : Dior)
크리스찬 디올 (출처 : Dior)

 많은 명품 패션 브랜드 중에서 디올은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디자인이 특징입니다.

 이는 디올의 창시자의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철학이기도 한데요. 현대 여성 패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는 어떻게 명품 브랜드를 만들게 되었을까요?



디올 브랜드의 탄생

예술가의 꿈

디올이 살았던 저택 디올이 살았던 저택 (현재는 디올 박물관으로 사용 중)
디올이 살았던 저택 디올이 살았던 저택 (현재는 디올 박물관으로 사용 중)
 태생부터 사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어릴 때부터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외교관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크리스티앙은 예술 분야로 진로를 가길 희망했었죠. 

 결국 아버지는 크리스티앙을강제로 '파리 정치 대학(그랑제콜)'으로 진학시킵니다. 외교관의 뜻이 없던 크리스티앙은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예술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지냈습니다. 대학 가면서 노는 동안 용돈을 벌기 위해서 자신이 그린 패션 스케치를 팔면서 생활비를 벌었죠.

 결국 대학 졸업장을 따지 못한 채 낙제생이 된 디올은 아버지의 지원으로 아트 갤러리 건물을 짓고 친구들과 함께 운영을 합니다. (핵 금수저의 삶...)

 아트 갤러리의 규모가 상당히 컸는데 당대 유명한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마르셀 뒤샹, 르네 마그리트,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의 엄청난 미술품까지 소장하고 거래를 할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그 갤러리는 오래가지 못 했습니다.



경제 대공황

 갑작스러운 전 세계 경제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디올의 아버지가 운영한 회사는 경영난에 시달렸고 결국 6년 만에 파산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아트 갤러리는 보유하고 있던 미술품들을 헐값에 판매할 수 밖에 없었고 그야말로 핵금수저에서 흙수저로 신분계급이 역전됩니다.

 이때가 디오르의 나이 29살이었습니다.


플리마켓에서 찍은 사진
플리마켓에서 찍은 사진

 디오르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대학 때 친하게 지냈던 예술가들의 도움을 받아 친구들이 그린 예술 작품을 판매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에게 의상 디자인에 대해서 소질이 있다는 이야길 듣고 자신이 그린 패션 디자인 스케치를 여러 디자이너들에게 판매하는 일까지 합니다.

 그렇게 스케치를 판매하다가 33살에 당대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로베르트 피게 눈에 들었고 그의 밑에서 디자이너로 고용됩니다.

 

로베르트 피게

로베르트 피게와 크리스티앙 디오르
로베르트 피게와 크리스티앙 디오르
 로베르트 피게는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였던 만큼 현재는 그의 인지도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밑에서 일했던 제자들을 보면 현재 명품 패션 브랜드의 주름잡는 디자이너들입니다.

 디올 뿐만 아니라 피에르 발망,  지방시, 마크 보한, 갈라노스가 있습니다.

 디오르는 피게로부터 '우아함에서 갖춰야 할 단순함'을 배웠다고 할 만큼 스승에게 좋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독립, 오트쿠튀르

 스승에게 디자인을 8년 동안 배우고 41세에 자신의 이름을 건 '디올' 브랜드를 오픈합니다. 그리고 '오트쿠튀르'에 도전합니다.

 오트쿠튀르는 상류층 맞춤옷을 만드는 패션쇼로 전 세계 패션의 트렌드 창조를 상징합니다.

 오트쿠튀르에 선보이는 것만으로도 세계 패션을 리드하는 유행의 시작점이고 오트쿠튀르 패션쇼에 참여 하는 것만으로도 패션디자이너에겐 꿈의 무대이죠. 오트쿠튀르의 영향력은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 입니다.

 좋은 스승 밑에서 오랜 숙련을 한 디오르는 경력을 인정받아 디자이너로서 첫 오트쿠튀르에 참여할 수 있었죠.

 오트쿠튀르를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 1년 동안 패션 디자인에만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42세에 전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뉴 룩(New Look) 패션

디올 뉴 룩(New Look) 패션
디올 뉴 룩(New Look) 패션

 크리스찬 디올은 자신의 첫 패션쇼에서 '뉴 룩' 라인을 공개하는데 당시엔 센세이셔널한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 전쟁통을 겪은 파리는 많은 사람들이 군복과 비슷한 펑퍼짐하는 옷을 입었고 '패션' 시장이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죠.

 크리스티앙은 특히 전쟁으로 인해 여성들도 군복이나 작업복을 입는 모습을 보면서 여성만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크리스찬 디올의 첫 오트쿠튀르 패션쇼 (출처 : Dior)
크리스찬 디올의 첫 오트쿠튀르 패션쇼 (출처 : Dior)

 뉴룩은 과거 전쟁 이전에 입었던 코르셋 드레스를 현대식 복장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죠.

 여성이 가지고 있는 곡선 형태를 잘 살린 것이 특징이며 디오르 스스로도 "나는 꽃을 디자인한다"라고 할 만큼 여성의 아름다움을 비유적인 표현을 하였습니다.



샤넬과 디올

디올은 샤넬과 대척점에 서있던 디자이너였습니다.

샤넬 수트
샤넬 수트

 샤넬의 슈트는 기존의 코르셋 패션에서 멀리 진보하여 남성에 가까운 직선적인 느낌을 살려 시크함을 강조했다면,

 디올의 뉴룩은 과거의 여성미를 현대식 복장에 맞게 살려서 화려하고 우아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샤넬은 디올의 뉴룩 패션을 보고

"여자와 소통하지 않은 남자는 여자에게 불편한 옷을 만든다" 라며 비판을 했었죠.

 실제로 과거 코르셋 패션에 영감을 받은 디자인이었기에 샤넬이 디자인했던 패션보다 활동에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습디다.

 일부 여성들도 전쟁에 참전하여 참정권을 얻은 여성을 과거 시대로 회귀시킨다며 비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뉴룩 패션은 다시 파리가 전 세계 패션의 중심지라는 걸 인정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전세계 여성들이 디올의 뉴룩 패션에 열광하였습니다. 비판의 의견도 있었지만 디올의 패션은 전쟁의 완전한 종식과 다시 여성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는 평화가 찾아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죠.



디올 창업자 크리스찬 디오르

 디올의 패션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에 영감을 주고 있으며 우리가 아는 톰브라운, 프라다, 비비안웨스트우드, 입생로랑 등 모두 디올 패션의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입니다.

샤넬이 현대 여성복의 어머니라면 디올은 현대 여성복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죠.

어쩌면 디올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여성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디올 의상을 입은 블랙핑크 지수
출처 : CNN
 이렇게 크리스찬 디올 브랜드의 탄생, 여자 패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에 대해서 정리했습니다.

혹시 본문과 관련해서 관심 있는 분은 아래 내용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